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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용어 본문
1. 표상/대표
과학적 표상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물과 자연에 대해 과학자에게 그들을 말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하며 정치적 대표는 동시에 한목소리를 낼 수 없는 시민 집단을 대신하여 주권자 혹은 대표자가 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각각 보일과 홉스로 대표된다. 홉스의 국가는 과학과 기술이 없이는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홉스 자신은 오직 벌거벗은 시민들을 대표하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반면 보일의 인식론인 비-인간의 표상은 과학에 속하지만 과학은 정치에 호소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시민을 대표하는 것은 정치의 일이지만 정치는 과학과 기술에 의해 만들어지고 동원되는 비-인간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도 허용되지 않느다. 하지만 표상과 대표 모두에서 과학자나 대표자가 자연이나 국민의 이름으로 자신의 생각만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할 수는 없다. 따라서 라투르는 보다 기계적이며 취소 가능한 대리/위임의 관계를 주장한다.
2. 대리/위임
과속방지턱에는 교통경찰의 의지가 시멘트나 아스팔트와 결합되면서 위임되며, 이 의지가 과속방지턱을 이루는 물질과 다시 분리될 때, 즉 과속방지턱의 물리적 실존이 해체될 때 위임은 철회된다. 라투르는 이러한 대리/위임의 관계가 기존의 표상/대표의 관계와 공존할 수 있는 사물들에게까지 확장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3. 집합체
기존의 공동체를 대체하기 위한 개념. 공동체란(자연, 대상, 사물과 분리된) 사회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인간 주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홉스의 사회는 사물이나 기술과는 무관한 순수한 인간, 즉 ‘벌거벗은 인간’들의 계약으로 성립된다. 이와 달리 집합체는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 모두를 포괄하는 집단, 사회, 혹은 공동체의 개념이다.
4. 연결망
라투르와 그의 동료들의 이론적 성과인 이른바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핵심 개념이다. 하이브리드나 기술의 속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순수한 인간적 연결망이나 전기공급망과 같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연결망 모두와 구분되는데, 자연과 사회, 담론의 영역을 모두 관통하는 매개 작용을 통해 증식, 확장되기 때문이다.
5. 매개
매개란 기술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행위자를 연결하여 새로운 하이브리드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총을 들게 되면 ‘총을 든 사람’이라는 새로운 행위자가 생겨나며, 이때 ‘사람’과 ‘총’을 연결하는 과정을 매개라고 한다. ‘총을 든 사람’이 만일 누군가에게 복수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면, 그 혹은 그녀를 ‘칼을 든 사람’과는 다른 성격의 목표를 실행할 수 있게 되고, ‘사람 손에 있는 총’ 또한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총’과는 다른 목표를 수행하는 비-인간 행위자가 되는 것이다. 라투르는 이를 번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6. 정화
매개와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연결망으로서 존재하는 하이브리드, 즉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의 결합체가 분할되고 절단되며 순수한 주체와 대상, 사회와 자연이 축출된다. 근대 과학과 지식은 매개과정에 의해 하이브리드를 엄청난 규모로 증식시키면서도 이르 정화한 결과로만 등장한 것이며, 이 두 과정의 불일치, 즉 정화작용으로는 감당할 수 없이 증가한 하이브리드 영역의 존재가 근대성 자체의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다.
7. 준대상, 준주체
주체와 대상 양극 사이와 그 아래에, 이원론과 변증법이 매듭을 짓지 못하고 끊임없이 돌기만 하는 자리. 준대상은 훨씬 더 사회적이고 훨씬 더 조작된 산물이며 자연의 견고한 요소들보다도 더 집합적인 성질을 띠지만 반면 결코 완성체로서 사회에 대한 자의적인 수용체는 아니다. 또 준대상은 사회가 스스로를 '투사'할 필요가 있는 무형의 스크린보다는 훨씬 실재적이고, 비-인간적이며 객관적이다. / 자연만큼 실재하며 담론처럼 서사적이고 사회만큼 집합적인, 그리고 존재처럼 실존적인 것.
8. 근대 헌법/ 비근대 헌법
근대의 헌법은 네 가지에 대한 보장을 포함하였는데, 첫째로 자연을 사회의 직조로부터 구분된 것으로 만듦으로써 자연의 초월성을 보장하였다. 두 번째로는 사회에게 그 내재적 차원을 보장했는데, 이는 시민들이 전적으로 자유롭게 사회를 인공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 세번째로 보장된 것은 권력분립, 즉 정부의 두 부문(사물과 인간)이 분리된 상태, 그리고 정확하게 구획된 상태인 것이다. 비록 자연이 동원가능하고 구성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사회와의 어떤 관계도 가지 않은 채로 유지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는 대상들의 매개를 통해 초월적이고 영속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연과는 어떤 관꼐도 갖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준대상들은 공식적으로 추방될 것이며 번역의 연결망들은 정화작용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것을 제공하면서 스스로를 숨기게 될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적과 감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네 번째로 보장되는 것은 소거된 신인데 이를 통해 그러한 신은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권력 없이 중재기능을 맡음으로써 이 이원론적이고 비대칭적인 매커니즘을 안정시킬 수 있다.
비근대적 헌법은 단일한 대자연과 대사회의 분리가 아닌, 인간-비인간 연결망들로서써의 작은 자연들과 사회들이 매개 작업에 의해 공동 생산되는 것을 보장한다.
9. 대칭적 인류학
자연과 사회를 분리해서 보는 제1대분할과 근대인과 전근대인을 분리하는 제2대분할을 동일한 관점에서 볼수 있어야 하고 양자 모두를 우리의 세계에 관한 하나의 특수한 정의이자 그 세계가 타자와 맺는 관계들이라고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서양에서의 인간과 비-인간의 극단적인 구분과 서양 이외 지역에서의 사회와 지식의 완전한 중첩 모두에 대한 믿음을 버림으로써 동시에 대분할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10. 절대적 상대주의/ 상대적 상대주의
절대적 상대주의는 보편주의의 시각을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옹호하지는 않기 때문에 문화들을 이국적 속성과 기이함 속에 이를 국한시킨다. 이에 따르면 보편적이고 단일하고 초월적인 측정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언어도 번역이 불가능하고 하나의 문화 고유의 감정들을 다른 문화와 교류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절대적 상대주의는 측정도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한다. 그럼으로써 과학과 자연을 뒤섞어 통약가능성 개념 자체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만들고, 모든 위계를 동등하게 만들었다.
반면 상대적 상대주의자들은 이보다 더 겸손하지만 경험적으로 도구와 도량형을 이용하여 비대칭성과 평등 각종 위계와 차이들을 만들어낸다. 측정된 척도들에 집착하는 사람에게만 세계는 통약불가능서의 여부로 파악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척도는 자연과학에서나 사회과학에서나 공히, 측정을 위한 척도이며 누금이 그어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통약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그 무엇도 자체만으로는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이 가능한 것도, 가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것 자체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으며, 언제나 다른 것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근대적이기를 중단한다면, 관계주의는 더 이상 근대화의 표적이 되지 않는 집합체들의 관꼐 형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될 것이다.
11. 재분배된 인간주의
인간을 헌법상의 두 극 중 어느 한쪽에 관련시키는 대신에 우리가 인간을 그 중간으로 접근시킬 때, 인간은 중재자가 되며 양극의 교차 지점이 된다. 인간적인 것은 비-인간적인 것에 반대되는 헌법상의 한 극이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두 표현은 다른 차원을 지시하기에는 더 이상 충분치 않은 결과들이다. 가치의 척도는 인간의 정의를 객체와 주체의 극을 연결하는 수평선을 따라 변경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비-인간 세계를 정의하는 수직축에 따라 움직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의 매개 작용을 드러내면 그것은 인간의 형태를 띠게 된다. 우리는 형태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들 간의 동맹관계와 교환관계는 한꺼번에 인간 자체를 정의한다. 형태론들을 모두 연결시키는 자가 곧 인간이다. 인간의 정의가 점점 이러한 분배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그것은 점점 더 다중적인 형태를 띠게 되며 그러한 형태 안에서 인간성은 즉시 식별이 힘들어지는데, 이는 그것의 형상이 인격, 개인, 혹은 자아일 때에도 마찬가지다. 대상들 모두는 그것이 추적한 집합체 내부를 순환하는 준대상이었다. 인간이 대상들을 만든 만큼 대상들이 인간을 만들기도 한 것이다.
12. 총체적 혁명
그러면 근대인이 처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라투르의 처방은 무엇인가? 그는 근대인이 저지른 잘못이 크기는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처럼 이를 자본주의, 제국주의, 과학, 기술, 지배 등 총체적 체계로 간주하여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그리하면 그 체계를 종식시키려는 총체적 혁명을 추구하게 되고, 그러한 혁명을 수행하는 데 총체적으로 실패하자 총체적인 탈근대적 절망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은 난공불락의 총체성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취약하고 수정가능한 하이브리드들과 이를 만들어낸 매개 작업들에 있었다고 보면, 이를 재구성하는 데서 해결책을 찾는 것이 훨씬 낫고 현실적이라고 라투르는 진단한다. 이를 위해 그는 근대적 헌법과 대조되는 원리를 지닌 비근대적 헌법을 확립할 것을 제안한다.
13. 사물들의 민주주의
비근대적 헌법은 총체적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근대인과 전근대인 그리고 탈근대인 각각에서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림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고 그는 본다. 예컨대 근대인으로부터 자연/사회의 분리는 버리되 행위의 대규모성은 취하고, 전근대인으로부터 규모 한계와 자문화중심주의는 버리되 비인간들에 대한 명시적 인식과 증식은 취하며, 탈근대인으로부터 근대주의에 대한 믿음과 비판적 해체는 버리되 구성주의와 성찰성은 취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하는 비근대적 헌법은 단일한 대자연과 대사회의 분리가 아니라 인간-비인간 연결망들로서의 작은 자연들과 사회들이 매개 작업에 의해 공동 생산되는 것을 보장한다. 또한 이러한 하이브리드들의 생산은 명시적이고 집합적이 됨으로써 그 생산의 속도를 조절하고 늦출 수 있는 확장된 민주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라투르는 '사물의 의회'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것은 오늘날 과학과 기술에 의해 창조되는 사물들을 위한 정치적 대표를 인정하여 민주주의를 사물에까지 확장하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하이브리드 사물들의 생산은 조절되고 재지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보는 것이다.
14. 비근대성
밝혀내기보다는 배치하며, 제하기보다는 부가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친밀해지고 폭로하기보다는 분류하는데, 이를 근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다. 근대인의 헌법과 함께 그 헌법이 증식시키기를 거부하면서도 허용하는 모든 하이브리드를 동시에 고려할 때에 누구나 비근대인이 것이다.
15. 탈근대주의에 대한 비판
탈근대주의는 징후일 뿐 새로운 해결책이 아니다. 탈근대주의는 근대적 헌법하에서 살고 있지만 더 이상 그것의 보장을 믿지 않는다. 탈근대주의는 근대적 비판 속에서 실패한 어떤 것을 감지하지만 그 비판의 토대를 믿지는 않지만 그것을 연장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근대주의가 끝장났다는 것을 감지하지만 계속해서 근대주의가 시간을 분할했던 방식은 받아들인다. 따라서 탈근대인들은 연속딘 혁명들의 관점에서만 시대를 구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근대인들 ‘이후에’ 왔다고 느끼지만 더 이상의 ‘이후’가 없다는 편치 않은 감정을 느낀다. ‘미래는 없다’ 이것은 ‘과거는 없다’는 근대인들의 모토에 덧붙여진 슬로건이다. 이들에게는 연결되지 않은 순간들과 근거가 없는 비난만 남는데, 탈근대인들은 그들이 비난하고 또한 분개할만한 이유들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다. 탈근대주의는 근대주의의 모순의 징후이지만 이 모순을 진단할 능력은 없는데, 근대 헌법의 동일한 상반부를 공유하면서도 그 헌법의 힘과 위대함의 원인을 더 이상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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